스포일러 주의!
요즘 넷플릭스에 정신을 팔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한데 새로운 패턴이 생겼다. 되새김질.
다시 봐도 기분 좋은 드라마가 있다. 어떤 작품을 다시 볼 때 재미는 좀 뒷전이다. 보는 동안 기억이 되살아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억뿐만이 아니다. 당시 느꼈던 감정 역시 되살아난다. '리타'를 처음 본 것은 1년도 더 된 일이다. 당시에도 가까운 사람들한테 드라마를 소개할 만큼 재미있게 봤었다. 처음에는 이유 없이 작품이 좋았다면, 두 번째는 그 이유를 더 자세히 곱씹게 된다.
리타는 덴마크 드라마다. 덴마크어에는 독일어 억양이 묻어 있는데, 고등학교 독일어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리타는 곱슬곱슬한 금발에 체크셔츠, 딱 달라붙는 스키니진에 높은 구두를 신고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중년 여자다. 앉을 때면 으레 다리를 꼬는데, 안 그래도 긴 다리가 더 길어 보인다.
학교에 다닌다. 담배를 문 채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걷는 폼은 영락없는 학생인데 사실은 선생님이다. 이따금 화장실 변기에 앉아 몰래 담배를 피우는 선생님. 그녀에게 우리가 아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단순히 나쁜 여자라는 답이 나온다. 특히 이성 관계는 이해불가. 그녀는 성적으로 자유롭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 드라마가 19금인 이유 중 하나다. 일상적인 부분은 지극히 명랑하다. 다만 가끔씩 지독하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터진다. 감정적으로 취약한 사람에게는 몹시 힘들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리타는 늘 "아니오."를 외친다. 학창시절의 반발심을 어른까지 몰고온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그러는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그렇다. 드라마는 어떤 늘씬한, 하지만 사회에 불만이 많은 한 '사람'의 상처를 답습한다. 하지만 깊숙이 베인 감정적 상처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다. 말로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드라마를 보면 자연히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통찰력과 비슷한 종류의 능력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다. 다시 봐도 역시나 좋았다. 묘한 설득력을 가진 작품이다. 리타가 겪는 심리적인 고통을 공감했고, 내가 그녀의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그리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삶을 따라가고 난 뒤의 개운함이란!
존재하는 모든 가정은 예외 없이 모두 다르다.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수많은 가정도 세부적으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국가를 지탱하는 법이 있고, 산하 기관마다 부수적인 규칙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것은 편의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는 사람이다. 법이나 규칙에 따를지언정 뚜렷한 주관이 있어야 한다. 리타는 그것을 가졌다. 그런 능력. 주관 혹은 특유의 직관이 있어서 그녀의 모자란 부분이 상쇄된다. 리타는 보통 사람들보다 실수를 더 많이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곧잘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리타'에는 상처 입고 무너지는 사람들이 나온다. 실상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끝이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언제나 방법을 찾아낸다. 좋든 나쁘든. 혼자서는 좀 어려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로는 타인의 도움이 절실할 때도 있을 것이다.
나만 헤매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늘 헤맨다. 겉으로는 쿨하고 멋져 보이는 리타 역시. 나의 모자란 구석 마저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얻었다.
* 등장인물
_리타
사고뭉치 여선생. 아픈 과거를 끌어안고 있다. 그녀를 통해 부모의 불안정한 정서가 어떻게 자식에게 전이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주관이 매우 뚜렷하며 거침없이 행동한다. 나는 여러 사회적, 도덕적 잣대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라 리타의 행동이 통쾌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_리코
리타의 첫째.
_몰리
리타의 둘째.
_예페
리타의 막내.
_예르디스
리타가 근무하는 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님. 리타와 대조적인 인물. 그래서인지 둘이 어울리며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_우페
예르디스의 남자친구. 좋은 남자.
시즌을 통틀어 리타와 늘 함께하는 인물은 예르디스가 유일하다. 선후임 관계로 시작해 진정한 친구로 발전하는 둘의 관계가 내게는 큰 영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