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스포일러하지 않으려고 신경쓰며 글을 썼지만 약간은 어쩔 수 없었다.
시즌은 총 열두 개.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편당 길어봐야 20분 밖에 안 되는 유쾌한 시트콤이다. 시즌 당 24편. 미국식 말장난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데 금방 이해하지 못해 1초 뒤에 웃게 될 때도 있다. 문화의 차이 때문이거나 내가 지내온 환경이 쓸데없이 진지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연기하는 게 너무 어려운 척 연기해야 해. 그러면 원래는 연기를 잘하는 내가 연기를 못하는 척 연기해야 하잖아? 그런데 정말로 연기를 못하는 연기를 잘하게 되면 실제로 연기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지어내긴 했지만 가령 이런 식의 말장난이다.
어쨌든 요즘 마음이 헛헛했는데 적잖이 위로 받았다. 시트콤의 매력은 아무래도 친근함이 아닌가 싶다. 요즘 그게 부족하다.. T-T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캐서디나의 어느 아파트에 배우를 꿈꾸는 금발의 미녀가 이사 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거기에는 크고 작은 괴짜 과학자 한 쌍이 산다. 레너드와 셸던은 각각 실험 물리학자와 이론 물리학자로 둘 다 박사 학위가 있는 닥터다.
제목이 '빅뱅이론'인 만큼 과학에 관한 내용이 많지만 살면서 우리가 흔히 겪는 감정적인 주제 역시 빈번하게 다룬다. 울고, 웃고, 사랑하는 것 말이다. 사실 사랑이라고 하면 다른 행성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 같지만.
나는 어떤 작품이든 일단 배우에게 끌리지 않으면 보지 않는 편이었는데 빅뱅 이론은 예외였다. 주요 인물은 죄다 공부 머리만 똑똑한, 소위 찌질남들인데 희안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들 중 그나마 정상적인(?) 남자 레너드조차 히어로물, SF판타지 덕후다. 게임을 좋아하고, 핼러윈이 되면 멍청해 보이는 옷을 입고는 좋아서 히죽거린다. 나중에는 거기에 덩달아 입 벌리고 웃게 된다. 이런..
이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아주 잠깐 동안 경험했던 흥미나 순수를 나이가 들어서도 잃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끌린다. 돈벌이나 사회적 성공, 아파트 할부금, 결혼, 이런 현실적인 문제에만 억눌려 있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다. 좀 버둥거릴 필요가 있다.
주요 인물 중 가장 두뇌가 명석한 셸던(짐 파슨스)은 사회성이 부족하다. 강박 쩔고, 말도 많다. 지독한 설명충에 로봇을 연상케 하는 남자다. 실제도로 왕따 당하기 딱 좋은 캐릭터인데 주변 친구들은 그의 그런 면을 이해하고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룸메이트인 셸던과 레너드를 중심으로 옆집에는 페니(금발의 미녀)가 살고, 하워드와 라지는 레너드와 친해서 자주 놀러온다. 남자 주요인물은 모두 소싯적에 '너드'라고 불리웠던 찌질남들. 그런데 너드였던 학창시절을 지나고 나서는 어떨까. 그 뒷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현실에서도 시트콤처럼 이런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다.
요즘은 우정에 관한 내용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애정 결핍과 비슷한 맥락의 결핍이 의심된다.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나는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잘 몰랐다.
미국 시트콤이라면 애쉬튼 커쳐가 나오는 '더 랜치'가 처음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더 랜치는 정말 재미있게 보다가 시즌 6부터 뭔가 이상해졌다. 작가가 바뀌었나. 단순히 취향이 바뀐 것일지도. 어쨌든. 빅뱅 이론은 과연 언제까지 재미나게 볼 수 있을는지. 어느새 거의 모든 시즌을 봤다. 후폭풍이 예상된다. 나는 어떤 이야기에 푹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지금 그렇다. 이야기가 끝나면 이것이 허구 속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울해지곤 한다. 흑흑.
_주요 인물 소개
_셸던
주로 레이어드 스타일에 프린트 티셔츠를 즐겨 입는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 특히 플래시를 좋아한다. 잘난척 대마왕에 친구들이 로봇이라고 놀리곤 하는데,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감정들을 성인이 되어 뒤늦게 하나씩 배워간다. 감정이나 정서적인 측면은 어린애나 다름없지만 보유한 지식은 만물박사 수준. 14세에 대학을 졸업할 만큼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친구들의 농담과 비아냥거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빅뱅이론의 오프닝이 몹시 정신없는데 셸던의 머릿속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_레너드
셸던이 살던 집에 룸메이트로 들어가 함께 산다. 셸던과 함께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빅뱅이론에서는 대체로 회마다 주요 등장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빈번하게 도마에 오르는 인물이다. 힌트를 주자면 옆집에 이사 온 금발의 미녀 페니와..
_페니
과학자들 틈에 끼어 맹한 면을 자주 보여주지만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다. 배우 지망생으로 CF와 삼류 영화에 출연한다. 전형적인 미국 금발 미녀의 외모. 육덕진 몸매는 덤.
_하워드
삐쩍 마르고 꾸부정한 MIT 출신 공학자. 페니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가방끈이 짧은데, 그래도 석사 엔지니어로 우주에도 다녀온 놀라운 인물. 성대모사의 달인. 두 번째 직업은 코미디언. 진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입심과 위트 만점이다. 처음에는 비호감에서 차츰 호감으로 바뀐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놀라운 경험.
_라제쉬(라지)
다들 그렇지만 라지 역시 연애 고자다. 인도에서 온 순박한 청년처럼 굴거나 친구들한테 면박 당하는 장면이 많지만 이따금 상 또라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미국 여자들이 흔히 영국식 억양이 섹시하다고 말하는데, 인도식 억양은 귀엽다. 라지는 혀짧은 인도식 억양으로 영어를 구사하는데, 남자인 내가 봐도 귀엽다. 아마 조금 머리가 이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_버나데트
페니와 함께 웨이트리스로 근무하며 하워드를 소개 받았다. 둘은 어떻게 될까. '베이글녀'라는 단어는 그녀를 위한 단어 같다. 미생물학 전공 박사 출신. 제약회사에 근무하게 된다.
_에이미
생물학자로 셸던과는 데이팅 앱으로 만나게 되는데, 영락없는 여자 셸던처럼 보인다. 회가 더할수록 에이미의 매력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괴짜다. 이들이 겪는 에피소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일도 얼마든지 하나의 값진 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말장난이 많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너무 정신없는데? 싶었는데 인물과 이야기에 적응할수록 차츰 재미가 더해진다.
요즘 내가 감상적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 마음 같아선 적어도 세 번쯤은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아니 네 번 이상. 세 번은 자막을 켜고 보고, 나머지는 자막을 끄고 영어 공부? 막상 영어 공부를 하지는 않겠지만.
하나 더 덧붙이자면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차근차근 증명하는 시트콤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보며 확인하길. 아마 사람마다 다른 것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다.